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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아빠랑]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역사종합선물세트'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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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등사 댓글 0건 조회 29회 작성일 18-11-11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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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역사종합선물세트' 강화도

청동기 유물로 시작해 외세에 항전한 근대 유적까지 한 번에 훑기

2018.11.07(수) 14: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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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한국] 아이와 함께 하루짜리 섬 여행을 계획한다. 목적지는 서울에서 가까울 뿐 아니라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가 두 개나 있는 강화도.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으니 여행 기분이 물씬 나는 것은 기본, 거기다 강화도는 선사 시대부터 근대까지 한반도 역사의 중심에 있던 곳이라 작은 섬을 한 바퀴 돌기만 해도 한반도 역사를 한 번에 훑을 수 있어서 더욱 좋다. 

 

# 강화 역사 기행의 출발점, 강화고인돌공원

 

아이와 함께 떠나는 강화도 역사기행의 출발은 강화고인돌공원이 딱이다. 청동기 시대의 거대한 고인돌 유적이 아이들의 시선을 잡아 끄니 흥행(?)을 염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 여기에 몇 가지 설명만 덧붙이면 된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부족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는 것, 이렇게 큰 고인돌을 만들 정도로 지배층의 힘이 세어졌다는 것, 이들은 청동검과 청동거울, 청동방울 등으로 치장을 하고 부족 사람들을 대표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 등이다. 

 

고인돌로 강화도 여행을 시작한다. 청동기 시대의 거대한 고인돌 유적이 아이들의 시선을 잡아 끄니 흥행(?)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사진=구완회 제공

고인돌로 강화도 여행을 시작한다. 청동기 시대의 거대한 고인돌 유적이 아이들의 시선을 잡아 끄니 흥행(?)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사진=구완회 제공


우리 민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단군왕검도 청동기 시대의 지배자였다. 혹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부족장이란 뜻이라고 옛날 국사시간에 배웠던 것이 기억나시는지? 이렇듯 초창기 지배자는 정치적 리더인 동시에 종교적 리더였던 것이다. 이쯤에서 아이의 질문이 나올지도 모른다. “수천 년 전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맨손으로 이렇게 거대한 고인돌을 만들었나요?”

 

그렇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의 손을 잡고 길 건너 강화역사박물관으로 향하자. 그곳에선 산에서 바위를 캐내고, 통나무를 이용해서 옮기고, 받침돌을 올린 뒤에 흙으로 둔덕을 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뒤 흙을 치워 고인돌을 완성하는 전 과정을 디오라마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마니산 참성대의 큰 사진 앞에서 선녀 마네킹과 함께하는 기념촬영도 빼먹지 말아야 할 코스다.

 

# 고인돌에서 신미양요까지, 강화역사박물관

 

강화역사박물관에는 청동기 시대 유물과 관련 전시물만 있는 게 아니다. 강화도는 청동기 시대부터 근대까지 우리 역사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삼국 시대에는 한강 유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전투가 강화도에서 벌어졌다. 알다시피 고려 시대에는 이곳에서 40년의 대몽항쟁이 벌어졌고, 근대에는 프랑스와 미국이 침략한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치열한 전투 현장이 바로 강화도다. 

 

강화도역사박물관에는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 장면이 실물 크기로 재현되어 있다. 사진=구완회 제공

강화도역사박물관에는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 장면이 실물 크기로 재현되어 있다. 사진=구완회 제공


박물관에는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강화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특히 신미양요 때 벌어진 광성보 전투 장면이 실물 크기로 재현되어 있는 것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끈다. 커다란 대포를 끌고 올라오는 미군을 향해 성곽 위의 조선 군인들이 총을 쏘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당시 조선 군인들이 쓰던 조총은 성능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조선의 군인들은 목숨을 걸고 용감히 싸웠고, 이는 강화역사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미군 병사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 한 자루 없이 우리에게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렬하게 싸우다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증언은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도 인용되었다. 

 

# 삼별초의 빛과 그림자, 고려궁지

 

강화역사박물관에 이어지는 코스는 이곳에서 차로 10분 남짓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고려궁지다. 여기서 고려의 무신정권이 궁궐을 짓고 40년 동안 몽골에 대항해 싸웠다. 하지만 열심히 싸우지는 않았다. 수전에 약한 몽골군은 강화도에 들어오지 않았다. 육지에서 상대가 안 되었던 무신 정권도 육지로 나가 싸우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항쟁 기간에도 조운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세금을 거둬서 잘 먹고 잘 살았던 것이다. 

 

고려 무신정권이 궁궐을 짓고 40년 동안 몽골에 대항해 싸웠던 고려궁지. 대몽항쟁의 아이콘 삼별초는 사실 몽골군과 제대로 싸운 적이 없었다. 사진=구완회 제공

고려 무신정권이 궁궐을 짓고 40년 동안 몽골에 대항해 싸웠던 고려궁지. 대몽항쟁의 아이콘 삼별초는 사실 몽골군과 제대로 싸운 적이 없었다. 사진=구완회 제공


대몽항쟁의 아이콘이 된 삼별초도 사실 몽골군과 제대로 싸운 적이 없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무신 정권의 호위부대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위세를 믿고 악행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망을 받고 있었다. 무신 정권이 무너지자 생존에 위기를 느낀 삼별초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하는 심정으로 벌인 것이 ‘삼별초의 항쟁’이었다. 물론 거기에 백성들이 참여하면서 항쟁은 의미를 가졌지만 말이다. 

 

아이가 이해하기에 조금 어려운 내용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무조건 우리 역사는 훌륭한 것이여~’ 하는 자세만 버리면 얼마든지 아이와 소통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는 것이 늘 그렇지 뭐~’ 하는 식민사관을 가져서도 곤란하지만 말이다. 

 

# 근대에도 이어지는 수난과 극복, 외규장각과 정족산성

 

지금 고려궁지에는 고려 시대 건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다른 곳처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된 것이 아니다. 고려의 항복을 받아들인 몽골이 강화도 궁궐의 파괴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저항할 생각도 하지 마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제 몽골의 침략을 더 이상 없었지만, 수백 년이 지난 후 강화도에는 서양 열강의 군대가 침략하게 된다. 허허벌판 고려궁지에 덩그렇게 복원된 외규장각 건물이 그때의 일을 증언하고 있다. 1866년 병인년에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은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귀중한 도서들을 약탈해갔다. 이것이 바로 ‘병인년에 벌어진 서양인들의 소란’, 병인양요(丙寅洋擾)다. 요(擾)는 작은 소란, 난(亂)은 큰 난리다.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한 표면적인 이유는 병인박해였다. 병인년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박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이 처형당했다. 단지 포교를 이유로 외국인을 처형하는 것은 지금으로 봐서 너무한 처사지만, 그렇다고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또 프랑스의 속내는 조선의 문을 열고 통상을 하기 원했다. 이 시기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아 세상 끝까지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인양요 당시 조선군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해 조선왕조실록을 지켰다. 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사고. 사진=구완회 제공

병인양요 당시 조선군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해 조선왕조실록을 지켰다. 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사고. 사진=구완회 제공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공격한 것은 이곳을 점령하면 한강을 통해 바로 한양으로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 정부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덕분에 정족산사고에서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은 지킬 수 있었다. 

 

고려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정족산성 안에는 강화도를 대표하는 사찰인 전등사가 자리 잡고 있다. 조금 가파른 계단을 올라 정족산성의 성문을 지나, 아름다운 전등사 경내를 거닐면서 병인박해와 병인양요, 정족산성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자.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정족산사고도 빼먹지 말 것. 

 

# 이어지는 패배의 기억, 광성보와 초지진

 

정족산성보다 규모가 큰 광성보는 신미양요의 격전지다. 아까 강화역사박물관에서 본 장면이 바로 신미양요의 광성보 전투를 재현한 것이다. 미군은 프랑스와는 다른 이유로 강화도를 침략했다. 5년 전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서 불탄 것은 빌미로 삼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억지스럽다. 제너럴 셔먼호는 통상을 요구하면서 대포는 쏘는 등 먼저 도발했기에 격침되었던 것이다. 물론 미국도 제너럴 셔먼호의 복수보다는 통상이 목적이었다.

 

이때 조선군을 이끌던 어재연 장군은 정족산성 때와 달리 미군에게 크게 패했다. 방금 남북전쟁을 치른 미군은 무기나 전투역량이 조선군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군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350여 명의 조선군이 전사했다. 그리하여 미군은 강화도 일부를 점령했으나, 그래도 조선이 문을 열지 않자 스스로 철수했다. 

 

신미양요의 격전지 광성보. 조선군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350여 명의 조선군이 전사했다. 사진=구완회 제공

신미양요의 격전지 광성보. 조선군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350여 명의 조선군이 전사했다. 사진=구완회 제공

 

초지진은 미국의 신미양요뿐 아니라 프랑스의 병인양요, 일본 운요호 사건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초지진 앞의 소나무(왼쪽)에는 당시의 포탄 자국이 남아 있다. 사진=구완회 제공

초지진은 미국의 신미양요뿐 아니라 프랑스의 병인양요, 일본 운요호 사건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초지진 앞의 소나무(왼쪽)에는 당시의 포탄 자국이 남아 있다. 사진=구완회 제공

 

미군이 처음 강화도에 상륙한 곳은 광성보에서 조금 떨어진 초지진이었다. 여기서 ‘진’은 나루 진(津)이 아니라 막을 진(鎭)이다. 그러니까 초지진은 배들이 들고 나는 나루터가 아니라 적들의 공격을 막는 군사요새다. 덕분에 이곳은 신미양요뿐 아니라 병인양요과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의 공격지이기도 했다. 

 

초지진 앞의 소나무에는 여전히 당시의 포탄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 결국 조선은 마지막으로 강화도를 공격한 일본에게 나라 문을 열었다. 그 문으로 근대 문물과 함께 열강 세력이 물밀 듯 들어왔고, 조선은 격랑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여행정보

 

1. 강화고인돌공원&강화역사박물관

▲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9

▲문의: 032)930-3114 

▲관람시간: 09:00~18:00(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 휴관)

 

2. 고려궁지와 외규장각

▲위치: 인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문의: 032)930-3114

▲관람시간: 09:00~18:00(연중무휴)

 

3. 정족산성과 전등사

▲위치: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문의: 032)930-3114

▲관람시간: 09:00~18:00(연중무휴)

 

4. 광성보

▲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 466번길 27 

▲문의: 032)30-7070

▲관람시간: 09:00~18:00(연중무휴)

 

6. 초지진

▲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58 

▲문의: 032)930-7072

▲관람시간: 09:00~18:00(연중무휴)

구완회 여행작가 writer@bizhankook.com 


출처: http://www.bizhankook.com/bk/article/16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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