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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등사 > 서운큰스님
등사 남문 종해루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왼쪽 언덕으로 부도전이 나온다. 이곳에는 서운 큰스님을 비롯해 그 동안 전등사를 거쳐 간 스님들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
서운 큰스님은 1903년, 경북 칠곡군에서 태어났다. 부잣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스님의 속명은 김한기였다. 한기는 어려서부터 무엇 한 가지 부러울 게 없이 지냈으며, 공부 역시 마음껏 할 수 있었다.
한기 소년은 일찌감치 서울의 보성고보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으며, 유교경전과 노장철학에도 통달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불교에도 깊은 인연이 있어 각황사(지금의 조계사) 학생회에 참여하여 당시 교학의 으뜸이었던 박한영, 한용운 스님 등에게 불교의 교의와 선지를 익혔다. 그리하여 김한기는 서양 철학은 물론 불교와 유교까지 통달하여 친구들로부터 ‘걸어다니는 철학사전’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는 보성고보를 졸업할 무렵 “이제 내가 더 배워야 할 것은 부처님 경전 밖에 없다.”고 선언할 만큼 불교에 깊이 심취했다. 하지만 그는 출가를 하는 대신 고시 공부에 전념해 공직자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속인 신분으로 파계사 성전암에서 참선 수행을 마치고 문득 한 소식을 전했다.
이 게송에 탄복한 제산 대선사는 그에게 ‘득장(得杖)’이라는 호를 내렸고, 쌍계사 조실이었던 설석우 대조사는 ‘백룡(白龍)’이라는 거사호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김적음 대선사와 박금봉 대선사 등도 스님의 선기를 크게 인정했다.
의 직위는 계속 올라 마흔일곱 살이 되던 1950년에는 ‘서울전매서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9·28 수복 후에는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엉뚱한 누명을 쓰고 헌병대로 끌려가 한 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결국 철저한 조사 끝에 무혐의로 석방되기는 했으나 집에 돌아와 보니 외동딸이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죽은 뒤였다. 외동딸 혜숙은 아버지가 죄 없이 헌병대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병을 얻고 끝내 이승을 떠났던 것이다.
속세의 삶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던 그는 제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를 했다.
출가하기엔 너무도 늦은 나이, 늦깎이 중의 늦깎이로 출가한 그는 상주 갑상사 등에서 피나는 정진을 거듭한다. 하지만 서운 스님에게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났으니 속히 상경하시오.”
동산·효봉 큰스님이 서운 스님을 불러올려 종단의 중책을 맡긴 것이다. 마흔일곱 살까지 국가의 최고 행정을 맡았던 서운 스님인지라 불교 정화운동의 회오리를 누구보다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서운 스님은 늦깎이임에도 불구하고 총무원장을 세 번이나 역임했고, 동국학원 이사장을 두 번이나 맡으며 한국 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다.
1983년부터 스님은 전등사에 주석하시면서 참선 수행에만 전념한다. 그리고 1995년 11월 15일 여느 날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먼 산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자리에 누우신 스님이 제자들에게 운을 뗐다.
“나는 오늘 갈 것이다. 오고 감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다. 내가 죽거든 내 몸에서 사리를 수습하지 말 것이며 다비식도 조촐하게 해라. 낡은 몸을 태우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것은 불조를 욕되게 하는 짓이다.”
이렇게 당부한 서운 스님은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겼다.
공교롭게도 스님은 출가일과 득도일, 열반일이 똑같았다. 스님은 세수 아흔셋, 법랍 마흔다섯 해로 열반에 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