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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이목 서운-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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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등사 댓글 0건 조회 80회 작성일 20-08-1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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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불연(佛緣)을 맺은 후 뒤늦게 출가했지만 평생 정화불사의 선봉에서 교단 발전을 위해 노력한 이목서운(二木瑞雲, 1903~1995)스님. 총무원장.감찰원장.동국대 이사장 등 사판(事判) 소임을 보면서도 수행의 본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성불하면 입적하겠다”는 스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서운선사법어집>과 불교신문을 참고하여 스님의 가르침을 조명한다.
 
 
 
“내일에 속지 말고 오늘을 잡아야 빛이 솟는다”
 
  
  “왜 거머쥐고 사느냐 손바닥을 펴라”
 
   공직 생활하다 출가 정화불사 ‘헌신’
 
  
○… 1984년 겨울 불교신문 기자가 대담을 위해 강화 전등사에 주석하고 있는 서운스님을 찾았다. 예를 올리고 나자, 서운스님의 첫마디는 이랬다. “왜 거머쥐고 사느냐, 손바닥을 펴라(開拳復成掌)” 스님의 가르침은 사바세계의 중생들에게 자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주먹을 쥐고 있으면 욕심과 집착이 생겨. 집착에서 벗어나 본래 자리로 돌아가야 돼. 어차피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야. 부와 명예도 권력도 소용없어, 자성(自性)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
 
○… 1962년 3월 정화불사 과정에서 신경통이 심해진 스님은 오대산 적멸보궁을 참배한다. 당시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에는 ‘오대산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연재가 실렸다. 이 글에서 스님은 “석가세존의 정골(頂骨)과 진신사리가 봉안된 오대청량산(五台淸凉山)의 적멸보궁을 참배코자 일대 용력(勇力)을 내어 여장(旅裝)을 차렸다”고 밝히고 있다. 홍천 수타사에 들린 스님은 도반인 주지 범룡(梵龍)스님 등 대중이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실천하며 사는 모습을 보고 “예경(禮敬)을 감출 수 없었다”면서 승려의 자세를 밝혔다. “승려의 내적수행을 알지 못하는 세인(世人)들은 흔히 승려를 가르쳐 무위도식배(無爲徒食輩)라고 함을 듣거니와 어느 누구도 수타사에 와보면 성농승(聖農僧)하는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자작자급(自作自給)하고 일일부작이일일불식(一日不作而一日不食)하는 승가의 철저한 근본정신이 여기에서 꽃핀 것이다. … 청청(靑靑)한 심산(深山)에 둘러싸인 이곳에서 맑은 물에 동심(同心)되고 대농작(大農作)에 백열(百悅)을 느끼면서 나는 이곳에서 마음 놓고 고달픈 몸을 쉬었다.”
 
○… 수타사에서 몸을 추스른 서운스님은 오대산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버스를 타고 횡성을 거쳐 진부 월정리에서 하차한 스님은 신작로를 따라 걸었다. 당시 스님 글을 살펴보면 “걸망이랬자 법의(法衣) 한 벌과 갈아입을 수 있도록 준비한 겹옷 한 벌에 내의(內衣) 한두가지가 들어있을 뿐이건만”이란 대목이 있다. 소탈한 수행자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용담(龍潭)을 지나면서 시 한수를 지었다. “靑山依舊水長流(청산의구수장류) / 幾多雲水過錫杖(기다운수과석장) / 我今長路水月流(아금장로수월유) / 忽聞人語無鼻孔(홀문인어무비공)” 이때 월정사 주지 희찬(喜贊)스님이 서운스님을 반갑게 맞이했다고 한다.
 
○… 1960년 8월 제2대 총무원장에 취임한 서운스님은 ‘종무행정 및 시정방침’을 발표하고, 불교중흥에 나섰다. 스님의 종단 운영 방침은 △자가숙정(自家肅正) △포교불사 △신도단체 △불교문화예술창조 등 4개 분야였다. 서운스님은 “상의하달.하의상달함으로써 혼연 일체한 종단을 재건한다”며 육화(六和)정신의 발휘를 강조했다. 또한 포교사 육성, 순회포교, 군종포교사 파견, 신도단체 일원화, 신도 교전(敎典) 소지, 국제불교 문화교류 강화 등의 과제를 제시했다.
 
○… 1993년 총무원 청사에서 열린 원로회의에 참석한 서운스님이 원로스님들에게 지압봉을 하나씩 선물한 후 말했다. “오늘부터 저를 이목당(二木堂)이라고 불러주세요. 저의 법호입니다.” 이목당은 부처님이 열반에 든 ‘사라쌍수’ 즉 쌍나무(雙木)란 의미가 있다. 당신도 곧 열반에 들겠다는 뜻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부처님처럼 살겠다는 것이다.
 
○… 늦게 출가했지만 정화불사 성공을 위해 진력을 다했던 서운스님. 비록 정화불사가 결실을 맺었지만, 그 후로 정화이념이 퇴색한 것에 심려를 나타냈다. 스님은 “모두 인과(因果)의 정신을 잃어버렸다”면서 “게다가 정각하겠다는 생각도 없어졌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1966년 8월7일자 <대한불교>에 ‘종단재건을 위한 고찰’이란 글에서 서운스님은 “구태의연한 자가도취에 만족하지 말고 백척간두진일보격으로 정진하자”고 호소했다. “우리는 정화 당시의 열렬한 근본이념으로 정화를 성취했으나 앞으로 대종단을 만년대계의 바탕 위에 세우고 수행과 교학면과 포교면에 있어서 정화 당시의 근본정신을 되살려 과거의 시비는 지양하고 오직 정화이념과 교단발전을 위해 총궐기해야 한다.”
 
○… 서운스님은 우리시대에 선지식이 자취를 감추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출가 전부터 적음(寂音).고봉(古峰).일봉(一峰).운봉(雲峰).동산(東山).청담(靑潭).금오(金烏)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과 교류하며 가르침을 받은 서운스님은 그 뒤를 이을만한 스승이 출현하지 않는 사실을 아쉬워했다. “오늘의 선지식이란 분들이 자기 목소리가 없어, 이미 산을 떠난 사람들 같아.”
 
○… 입적에 들기 여러해 전. 다음 생에는 어떤 일을 할 것인지 한 제자가 여쭈었다. 서운스님은 “내생에는 소로 태어날 것”이라고 답했다. 이유가 궁금했다. “아랫마을 시주집의 소로 태어나 구세의 덕을 심으며 밭이나 갈란다. 하지만 ‘無一心而非佛心(무일심이비불심)이고 無一塵而非佛國(무일진이비불국)이라고 했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이 부처님 마음과 다르지 않고, 티끌 하나 하나가 불국토 아닌 곳이 없는데, 어디에 태어난 들 무슨 상관이야”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어록
 
“부처님은 제일 가난하고 불쌍한 땅에 태어나신다.”
 
“법(法)에는 돈점(頓漸)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을지언정 본성은 원래 차별이 없다.”
 
“망념을 제거하고 본래면목을 알게 되면 생사에서 자유스러워지리라.”
 
“4월 혁명(4.19)은 순결한 학생의 피의 외침으로 민주재건의 새 역사를 창조할 계기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진정한 출가는 마음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실로 천국도 묘용(妙用)도 내심(內心)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내년이면 또 그날이 온다. 그러나 이것은 관념이다. 내일에 속지 말고 오늘을 잡아라. 거기서 생명의 빛이 솟는다.”
 
“(불교정화) 실천에 있어서 불교도는 재판(裁判)에만 의존치 말고 재판 전야(前夜)에서 수도인(修道人)답게 해결하여야 할 것이며, 불타(佛陀)의 근본사상을 떠나고 교리를 위배하는 자는 곧 불제자가 아닐 것이요, 마졸(魔卒)이 틀림없을 것이다.”
 
 
 
 
■ 행장
 
 
‘선·교’ 두루 겸비한 수행자
 
 
1903년 5월16일 대구 읍내동(邑內洞)에서 부친 김봉산(金奉山) 선생과 모친은 현풍 곽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김한기(金漢基). 본관은 김해.
 
어린시절 성품이 고매(高邁)하고 영민했다. 1923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노장철학(老莊哲學)에 심취했지만 “이제 갈 곳은 부처님 경전 밖에 없다”며 불교와 가까워졌다. 이 무렵 김법린.최범술과 같이 불교청년운동에 참여했고, 만해(萬海)스님에게 ‘독립운동과 출세간(出世間)의 자유’를 배웠다.
 
 
총무원장 불교신문사장 역임
 
조계종단 초석 마련한 장본인
 
 
스물아홉 살 되던 해에 재가불자의 신분으로 대구 파계사 성전암(聖殿庵)에서 금오(金烏).전강(田岡)스님과 하안거에 들어 정진하기도 했다. 적음(寂音).금봉(錦峰)스님 등 제방의 선지식에게 선기(禪機)를 인정받았다. 제산(霽山).석우(石友)스님에게 각각 ‘득장(得杖)’과 ‘백룡(白龍)’이란 호를 받았다.
 
<사진>1950년대 중반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원로스님들과 함께한 서운스님(앞줄 오른쪽 끝).
 
학교 졸업 후 공직에 근무하다 마침내 출가했다. 이때가 1950년. 출가 도량은 공주 마곡사, 은사는 제산스님이었다. 1951년 금봉스님에게 구족계를 수지한 후 수행에 몰두했다. 서산 간월암에서 3년 결사 보임(保任)을 했다. 1954년 상주 갑장암에서 정진할 때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 동산(東山).효봉(曉峰)스님의 부름을 받고 상경했다. 청담(靑潭).경산(慶山).지효(智曉).월하(月下).구산(九山)스님과 같이 정화불사에 참여했다. 조계사 대웅전에서 단식 정진할 때 대처측의 습격을 받아 병상에 눕기도 했다.
 
정화불사 후 충남종무원장, 경북종무원장,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하고, <처무규정(處務規定)>이란 책을 펴내 종무행정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1962년 제2대 총무원장을 맡아 종단의 초석을 놓았다. 이밖에도 불교신문 사장, 동국학원 이사장, 감찰원장, 팔공산 동화사 주지, 서울 봉은사 주지를 지냈고, 스리랑카에서 열린 제10회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83년에는 세수 80세의 고령으로 또 다시 총무원장을 지내며 혼란에 빠진 종단을 수습했다. 1985년부터 조계종 원로의원과 강화 전등사 조실로 지내며 후학을 지도하고 대중을 맞이했다.
 
1995년 11월15일 자시(子時) 제자들을 불러 놓고 “다비장이 준비 됐느냐” “오늘 갈란다”라며, 임종게를 한 후 열반에 들었다. 세수 93세, 법납은 45세. 스님의 비는 1997년5월 강화 전등사에 모셨다. 은(恩)제자는 세웅(世雄).상묵(象默).의룡(義龍).종래(宗來).세연(世衍).묵조(默照).종법(宗法).종선(宗禪).세법(世法).무선(武禪).대선(大禪).계성(啓聖).인상(仁相) 스님, 법(法)제자는 금산(錦山).세종(世宗).송오(松悟).수암(竪庵)스님이 있다.
 
 
 
 
■ 서운스님 오도송
 
探花十年未見花(탐화십년미견화)
 
꽃을 찾아 10년 동안 방황했으나
 
眼前紅花花灼灼(안전홍화화작작)
 
이제야 눈앞에 붉은 꽃이 타고 있는 것을 보겠네
 
山門肅靜天地開(산문숙정천지개)
 
산속의 고요 속에 천지를 여니
 
毘盧遮那門外客(비로자나문외객)
 
비로자나 법신불이 문 밖의 손님일세
 
 
[불교신문 2590호/ 1월16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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