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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지붕없는 역사박물관, 강화도 -2022.9.7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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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등사 댓글 0건 조회 140회 작성일 22-09-0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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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zine]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 강화도

송고시간2022-09-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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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정에서 본 한강. 건너편은 북한이다.[사진/조보희 기자]

연미정에서 본 한강. 건너편은 북한이다.[사진/조보희 기자]

(강화=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강화도를 얼마나 아시나요?"라는 질문에 "서울에서 가까운, 서해안의 경치 좋은 섬" 정도로 답한다면 강화도를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강화도는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쯤에 있다. 서해에서 한강을 통해 서울로 들어가는 관문에 자리 잡았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세 강이 휘돌아가는 지점이다. 강화를 전략적 요충지로 만드는 자연조건들이다. 한반도 중심부였던 까닭에 강화도는 한국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큼 유구하고 굵직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인 마니산 참성단, 고려 시대 대몽 항쟁기 궁궐터, 17세기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 관련 유적, 19세기 병인양요 및 신미양요의 격전을 치렀던 조선의 군 요새들….

아울러 중립 수역 건너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북녘땅이 아득한 옛날부터 근·현대까지 강화에서 이어진 격동의 역사를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강화도는 아름다운 섬인 동시에 섬 전체가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다.

부근리 탁자식 고인돌. 남한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사진/조보희 기자]

부근리 탁자식 고인돌. 남한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사진/조보희 기자]

◇ 가장 큰 탁자식 고인돌…강화지석묘

강화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강화지석묘는 길이 6.4m, 폭 5.2m, 높이 2.5m에 이른다. 덮개돌의 무게만 53t, 받침돌을 합한 전체 무게는 75t이다. 남한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탁자식 고인돌로, 세계 거석문화의 표상처럼 언급된다. 거석문화란 자연석 또는 가공한 돌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거나 무덤으로 이용한 것을 말한다. 고인돌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 널리 분포하고 있으나 한반도에 가장 많다. 세계 고인돌 중 우리나라 고인돌만 유일하게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강화에는 15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이 많은 것은 강화가 옛날부터 기온이 온화하고 강우량이 많아 농경이 발달하고 해산물이 풍부했음을 뜻한다. 강화는 옛날부터 풍요와 번영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마니산 정상 표지목. 뒤로 참성단 일부가 보인다.[사진/조보희 기자]

마니산 정상 표지목. 뒤로 참성단 일부가 보인다.[사진/조보희 기자]

◇ 단군 유적과 최고(最古) 사찰…마니산과 전등사

강화에서 가장 높은 마니산(해발 472.1m) 정상에는 단군이 천제를 지내던 곳으로 고려사와 세종실록에 기록돼 있는 참성단이 있다. 지금도 개천절이면 민족 성지인 참성단에서 제례가 올려진다.

전국체육대회 성화가 채화되는 곳도 참성단이다. 마니산에는 등산코스 4개가 있다. 계단 1천4개가 있어 개미허리로 불리는 계단로 코스, 마니산 매표소에서 시작해 능선과 계곡을 따라 걷는 단군로∼함허동천 코스 등이다. 마니산은 산세가 수려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기(氣)가 가장 센 곳이라 하여, 제1의 생기처라 불린다. 정상에 오르면 인천국제공항, 영종도, 장봉도 등 주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와 관계없이 사시사철 많은 탐방객이 찾는다. 마니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서남쪽 풍경. [사진/조보희 기자]

마니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서남쪽 풍경. [사진/조보희 기자]

우리가 방문한 날도 비가 꽤 내렸지만 이른 아침부터 등산객이 이어졌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사찰 중 가장 오래됐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정족산 삼랑성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경내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사고가 있었다. 1천181책에 달하는 정족산사고 본은 조선의 5개 사고 본 중 유일하게 한 권도 유실되지 않고 전책으로 남았다. 정족산은 근대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1866년) 때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군을 격파했던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성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다.

고려와 조선의 공식 기록에서 언급된 단군 유적은 남한에서 강화가 유일하다. 고인돌, 마니산, 참성단, 전등사는 한반도 개국 역사에서 강화가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다.

정족산성과 남문인 종해루.[사진/조보희 기자]

정족산성과 남문인 종해루.[사진/조보희 기자]

◇ 38년의 수도, 찬란한 문화를 낳다

반만년 한국사에서 강화가 한때 나라의 도읍이었던 사실은 점차 잊히는 듯하다. 1231년 몽골이 침략하자 고려는 1232년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38년 동안 강화는 고려의 수도였으며 항쟁의 근거지였다. 9차에 걸쳐 일어난 여몽전쟁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이었다. 인류 역사상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하며 자긍심을 지켜낸 민족은 많지 않았다. 고려는 대몽항쟁 기간에 방어시설로 궁궐과 궁궐을 둘러싼 내성(7㎞), 도읍을 감싸는 중성(11㎞)을 쌓고, 동쪽 해안에는 외성(23㎞)을 지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팔만대장경은 고려가 강화도 도읍 시기에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골을 물리치고자 판각한 것이다.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으로 추정되는 '상정고금예문'도 강도(江都) 시기인 1234~1241년에 편찬된 것으로 고려의 대학자 이규보가 엮은 '동국이상국집'에 기록돼 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1377년)보다 상정고금예문은 150년가량 앞서 만들어졌으나 현재 이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정족산사고[사진/조보희 기자]

정족산사고[사진/조보희 기자]

인쇄술은 대내외의 어려움 속에서도 고려가 강화에서 이룬 찬란한 문화를 엿보게 한다.

강화읍에 있는 고려궁 터에서는 당시 궁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몽골이 화친 조건으로 요구한 데 따라 모두 허물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정조 때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으로 외규장각을 고려궁 터에 설치해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를 포함해 서적, 은괴 등을 약탈해갔다.

◇ 섬 전체가 군 요새…5진 7보 54돈대

조선 중기 강화는 임금과 조정의 피난처였다.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략한 정묘호란 때 강화 연미정에서 굴욕적인 '형제의 맹약'이 두 나라 사이에 이뤄졌다. 1636년 청나라가 침입한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강화로 가려다 실패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이때 강화산성 남문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김상용 등 관리와 여인들이 청군에 항거하며 순절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신미양요 무명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순의총[사진/조보희 기자]

신미양요 무명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순의총[사진/조보희 기자]

2차례 호란을 겪은 뒤 조선은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진(鎭), 보(堡), 돈대(墩臺) 등 군사시설을 해안에 설치했다. 진은 대대, 보는 중대 규모의 군대이며 돈대는 흙과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시설이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부터 현종, 숙종을 거쳐 영조 때까지 쌓은 군사시설은 5진, 7보, 54돈대에 이른다. 총 둘레가 100㎞ 안 되는 강화 본섬 해안에 50개 이상의 돈대가 설치됐으니 돈대 사이 평균 거리는 2㎞가 채 되지 않는다. 요새로 섬을 둘러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후반 조선을 향해 서양 세력이 밀려들면서 수도 입구를 지키던 강화는 조선과 서구가 충돌하는 현장이 됐다. 조선과 서양의 첫 무력 충돌이었던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일어난 신미양요 때 동쪽 해안의 돈대들은 미군 포격으로 쑥대밭으로 변했고 조선군은 대패했다. 당시 광성보는 최대 격전지였다. 복원된 광성보에는 미국 군함 5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 무명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순의총, 주변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한 손돌목돈대가 있다.

초지진[사진/조보희 기자]

초지진[사진/조보희 기자]

인천과 강화도 사이에 있는 강화해협을 사수하는 진·보 중 제일 남쪽에 있어, 침입하는 외세에 맨 먼저 맞서야 하는 초지진 외벽 옆에 서 있는 노송 줄기에는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쏜 포탄 자국이 선명하다. 초지진은 1875년 조선군이 일본 군함 운요호와 처음 교전한 곳이기도 하다. 함포를 앞세워 불리한 통상을 강요한 운요호 사건 후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일본 식민주의 침략의 시발점이 됐다. 강화대교 옆에 있는 갑곶돈대는 염하(鹽河, 짠물 강)라고도 불리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또 다른 요새이다. 고려와 몽골이 외교 교섭을 벌였던 장소인 이섭정이 있고, 조선 시대 대포 실물이 전시돼 있다. 400여 년 전 적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갑곶돈대 옆에 심은 탱자나무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 가시가 유난히 크고 날카롭게 보였다.

◇ 북한 생활상이 맨눈으로 보여요

강화는 근대를 지나 현대에도 격동의 역사 현장으로 남아 있다. 월곶돈대가 있는 연미정이나 강화 본섬 북쪽 끝에 있는 평화전망대에 서면 북한 땅은 멀리 개성 송악산까지 보인다. 대룡시장 벽화[사진/조보희 기자]

대룡시장 벽화[사진/조보희 기자]

강화 본섬 해안에서 북한 개풍군 해안까지 거리는 가장 짧은 곳이 1.8㎞에 불과하다. 마포대교 길이가 1.4㎞가량인 점을 고려하면 강화도와 북한이 얼마나 가까운지 가늠할 수 있다. 강화도에서는 북한 주민 생활상을 맨눈으로 볼 수 있다. 평화전망대는 전등사와 함께 강화에서 관광객이 제일 많이 찾는 장소이다. 평화를 향한 염원이 읽히는 대목이다. 강화군의 또 다른 섬인 교동도는 섬 전체가 민통선 지역이다. 연산군 유배지, 1286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인 교동향교, '핫 플레이스'로 뜨고 있는 대룡시장, 여름이면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고구리 저수지가 있다. 황해도 출신 실향민이 운영하는 상점이 많았던 대룡시장은 한국전쟁 후 70여 년 세월의 흔적을 간직했다. 1960~1970년대 모습이 남은 이곳을 찾는 젊은 관광객이 늘고 있다.

교동 고구저수지[사진/조보희 기자]

교동 고구저수지[사진/조보희 기자]

바다, 산, 섬이 어우러진 강화는 풍광이 빼어나고 청정하다. 개국의 희망, 국난 극복 의지가 서린 땅인 강화는 이제 통일을 기원하는 평화의 땅으로 변모했다.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면 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과 백성이 걸어야 할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북한, 중국과 가깝고 수도의 관문인 강화는 남북통일, 동북아 시대가 도래하면 한반도의 미래를 앞장서 열어갈 잠재력을 가졌다.

길과 길은 만나고 모든 길은 연결된다. 미래를 향한 강화의 길은 어디에 있고, 한반도가 나아갈 길과 어디쯤에서 만날까?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9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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