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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조선왕조실록 전북에서 부활하다’ (9)정족산 사고지 - - 전북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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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등사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6-09-04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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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을 강화로 옮겨라!

선조 27년(1594) 9월에 전주본 실록을 보존하고자 황해도 해주산성에 사각(史閣)을 세우려고 했지만 황해 감사 이정립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래서 다음해 9월에 해주부 동루(東樓)를 수리하고 근처 집들을 철거한 후 임시 보관처로 삼았고, 다시 11월에는 객사에 옮겨놓고 영구 보존할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러다가 선조 30년(1597) 9월에 묘향산 보현사 별전(別殿)으로 옮겨졌고, 선조 35년(1602) 8월에 영변 객사로 이동한다. 영변 객사는 설비를 갖춘 사고가 아니었고, 이즈음 복본 제작 논의가 일어나 다시 선조 36년(1603) 5월에 한양과 가까운 “강화(江華)에다 국을 설치하여 인쇄(設局於江華印出)”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가 1603년 7월부터 1606년 4월까지 작업하여 실록 5부를 마련한 것이다,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서 바라본 진강산, 정족산, 그리고 사고지 전경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서 바라본 진강산, 정족산, 그리고 사고지 전경
이처럼 실록 보관처로 강화도가 중시된 이유는 인조 4년 10월에 “강화의 형세는 참으로 하늘이 만든 요새이다. 만일 사변이 나면 육지는 남한산성과 같은 곳이 없고, 섬은 강화 같은 곳이 없다(江華形勢 眞天作之區也 若有事變 則在陸無如南漢 入島無如江華)”고 한 것처럼 조선시대에는 비상사태 대피처로 육지는 남한산성이 제일이고, 섬은 강화가 제일이라는 인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강화도에 정식으로 사고가 설치된 것은 선조 39년(1606)이다. 4월에 “강화 사각(史閣)은 작년에 이미 건립됐다(江華史閣 上年已爲修建)”고 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구본[舊件, 전주본]은 그대로 강화에 소장(舊件則仍藏于江華)”한다고 나오는데 ‘명종실록’ 1권 부록에는 “구본[舊件, 전주본]은 강화 마니산에 소장(舊件則藏于江華之摩尼山)”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정귀(1564~1635)의 ‘월사집’(1636)에 “구본은 강화에 보관(舊本則藏於江華)”이라거나, ‘승정원일기’ 현종 즉위년(1659) 12월 26일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의 상소에 “사고가 (강화)부내 여염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史庫在於府內閭舍不遠之地)”고 한 것들을 보면, 강화사고가 반드시 마니산사고를 의미하지 않음이 엿보인다. 정족산사고 설치 이전부터 이후까지의 기록들은 대부분 ‘강도사각(江都史閣)’·‘강화사각(江華史閣)’·‘강화사고(江華史庫)’라 적었다.

정족산 사고 장사각, 선원보각
정족산 사고 장사각, 선원보각
한편,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안의 정족산사고는 효종 4년(1653) 11월에 “강화 사각에 불이 나서(江華史閣失火)” 많은 기록들이 타버리자 현종 1년(1660) 11월 정족산성의 축성이 완료되자 “실록을 성안의 사각으로 옮겨 봉안토록(移奉實錄於城內史閣)” 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정족산사고는 2층 누각 형태인 태백산·오대산·적상산사고와 달리 단층 건물이다. 사고는 전등사 경내 서쪽으로 해발 150미터 높이에 남향이며 선원각과는 좌우로 건립되었다. 사고는 조선말까지 지속되었으나 1918년과 1919년 사이에 철거되었고 10여 개의 초석만 남았다가 현재의 건물(장사각 및 선원보각)은 1999년에 복원하였다.

1910년 일제 강점 후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고본 및 규장각의 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옮겨져 보관되었다가 다시 1930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뒤,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계속 보존·관리한다.

마니산 정상에서 바라본 강화도 북쪽 바다
마니산 정상에서 바라본 강화도 북쪽 바다
#병인양요와 “왕실 기록의 꽃 의궤”의 수난

강화도는 대몽골항쟁의 중심에 있었던 이후 국가 유사시 왕의 피난처이자 조선 왕실의 최후의 보장처(堡障處)로 인식된 곳이다. 1617년에 전주에서 모사된 평양 영숭전 봉안차 태조어진이 강화도 영숭전에 봉안되었고, 숙종어진, 영조어진이 차례로 강화도 장녕전, 만녕전에 봉안되었으며, 외규장각을 두어 왕실의 어람용 의궤를 봉안하였다. 또 전주를 떠났던 조선왕조실록이 내장산- 아산-해주를 거쳐 강화도에 보관되었다가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에 묘향산 보현사로 이동하기도 하였고, 후에 강화도에 사고를 두어 실록을 보관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왕의 강화도 피난이 막힌 이후 남한산성에서의 항전은 50일 만에 끝나고 말았았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 대한 왕실의 신뢰는 여전하였다.

물론,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 즉 인조임금의 청나라 입조(入朝) 요구가 있었을 때, 또 청나라 내 삼번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에 호응하여 병자년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 논의가 강화될 때에 동시에 강화도 이외의 피난처로서 전라도 부안 격포행궁이 조성되고(1640), 그 배후지로서 적상산성 축성, 위봉산성 축성(1675~1682)이 이루어졌다. 왕실의 안녕을 위한 비밀피난루트였지만 청의 대륙 지배는 확고해졌고, 정치적으로 대청 관계가 안정화되면서 북벌이나 결사항전의 태세는 점점 누그러졌다. 오히려 수도 한양을 지키기 위한 안정적인 해상방어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으며, 강화도의 역할은 더욱 강화되었다. 정족산성(1660)과 사고의 설치, 강화부성(1677ㆍ1711)의 재개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돈대 49개소와 외성의 수축(1691~1692)은 강화도 방어체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시설물이다.

그러나 서세동점(西勢東點)의 시대에 이르러 바다는 전세계를 잇는 넓은 길이었고, 바다를 통한 약탈제국주의가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우리나라 또한 예외 지역이 아니었다. 병인양요는 1866년(고종 3) 음력 8월~10월 사이에 강화도 및 경기 통진부 일대에서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격돌한 사건이다. 이양선(異樣船)의 출몰은 종종 있었으나 함포를 갖춘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조선의 심장부에 총구를 겨눈 것은 병자호란 이후 230년 만에 맞는 국가위기였다.

프랑스는 동아시아 지역내 상업ㆍ외교활동에 필요한 교두보를 확보하여야 한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당시 프랑스 선교사 살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을 넘보기 시작하였다. 1846년(헌종 12) 음력 6월 20일 충청도 홍주 외연도에 도착하여 조선 조정과 면담을 요청하였고, 1847년(헌종 13) 음력 6월 12일 만경현 고군산도에 도착하였으나 암초에 좌초되었다가 영국 군함의 구조를 받아 귀환한 일이 있었다. 또 1852년 7월 프랑스 이양선 1척이 만경현과 고군산도 일대를 항해하기도 하였다. 1856년(철종 7) 음력 6월 4일 조선 연해에 이르러 약 2개월간 조선 동서남해안 일대를 두루 답사하였다. 조선의 식민지화 계획 가능성과 조선의 정보 탐색이 목적이었고, 표면적으로는 러시아의 남하 방지에 있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나 병인양요가 일어났던 것은 앞서 제시한 여러 가지 목적에도 불구하고 병인박해(1866), 즉 대원군의 천주교 신자 학살 및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처형된 박해가 계기가 되었다. 박해에서 살아남았던 선교사 리델이 중국으로 탈출하여 프랑스함대 로즈 사령관에게 박해 소식을 알렸다. 이로 인해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점령이 이루어졌고 방화, 파괴, 약탈을 자행하였다. 문수산성 전투 및 양헌수의 정족산성 전투 등의 조선군 대응으로 함대가 철수하였다. 다행히 강화도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강화도 점령시 고도서 345권, 은괴 19상자 887kg 550g 등을 약탈해 갔다. 고도서의 소재가 밝혀진 것은 1970년대 중반 서지학자인 고(故) 박병선(1923~2011) 여사 덕분이었다. 박병선 여사는 전주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제7대학에서 역사학으로 박사를 취득(1971)하였다. 이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 파리 제7대학교 동양학부 강사, 콜레주 드 프랑스 연구원 등을 역임하였다.

정족산 사고 정문
정족산 사고 정문
여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를 있을 때(1967~1979)이다. 조선에서 약탈 자료들이 1867년 해군성에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하였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도서관내 외규장각 의궤의 소재를 정확히 찾아낸 것은 1978년 10월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1978년 10월 28일자 기사에 는 “파리 교외의 프랑스국립도서관 별관에서 총 130종 345권의 한국 고서를 찾아내 목록을 작성했다고 발표했다. 발견된 고서중 297권은 필사본이며 나머지는 판본과 탁본이다.” “345권 중 ‘산릉도감의궤’, ‘헌경혜빈빈궁도감의궤’, ‘현빈궁옥인도감의궤’, ‘규장각형지안’, ‘수리도감의궤’ 등의 도서명이 확인”되었다고 보도됐다. 한 연구자는 당시 외규장각에 1,042종 6,130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프랑스로 약탈된 345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때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였다.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 교섭이 시작된 것은 1991년 10월이었다. 그리고 2011년 외규장각 의궤가 ‘5년 단위 갱신 형태의 임대’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됐다. 국난으로부터 역사를 지키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빼앗긴 문화유산을 반환하려는 노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다.

첨성단
참성단
 #전등사가 품은 사고-섬과 산성을 걷다

  강화는 그 안에 다시 산과 성이 사람이 겹겹이 들어앉은 땅이다.

 이른 새벽 정족산 사고를 찾아 삼랑성 동문을 들어서던 날, 나는 이 자리가 왜 실록의 마지막 보루로 선택되었는지를 걸음마다 실감했다.


 정족산(鼎足山)은 이름 그대로 세 발 달린 솥처럼 세 봉우리가 안쪽을 감싼 산이다. 그 능선을 따라 삼랑성이 둘러 있고, 성이 품은 아늑한 분지 안에 사고와 전등사가 위아래로 가지런하게 앉았다.

  밖에서는 성벽과 숲에 가려 사고가 보이지 않는다. 성문을 들어서야 비로소 그 자리가 드러난다. 천혜의 보고인 이곳은 섬(바다)·성(산성)·절(전등사)이 삼중으로 겹친다.

 삼랑성(三郞城)은 단군이 세 아들에게 쌓게 했다고 전하는 성으로 삼랑(三郞)은 세 아들을 뜻한다. 정족산 세 봉우리를 잇는 이 성은 정족산성으로도 불린다.

 육지의 산속 사고들이 ‘접근의 어려움’으로 기록을 지켰다면, 사고는 겹겹의 방어선으로 지켰다. 바다가 첫 번째 성벽이었고, 산성이 두 번째였으며, 전등사의 승려들이 세 번째 파수꾼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이 구조는 실제로 힘을 발휘했다.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 500여 명이 밤을 틈타 정족산성에 매복해 있다가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이 승리로 정족산 사고의 실록과 전등사가 화를 면했다. 사고는 애초에 이렇게 지켜지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대웅전을 등지고 돌아 산길을 타고 올라가면 사고 터에 이른다.

 맨 먼저 사고의 정문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안에는 복원된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 단정하게 서 있다. 장사각엔 실록을 선원보각엔 왕실 족보를 나누어 보관한다. 오늘은 유난히 담방 밖 돌탑들이 아침 햇살에 눈 부시도록 빛이 난다.

사고지 올라가는 길에서 본 전등사의 아침
사고지 올라가는 길에서 본 전등사의 아침
 내려오는 길에 전등사 대웅전 처마 아래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네 귀퉁이 처마 밑에는 지붕을 떠받친 벌거벗은 목각 인물상이 앉아 있다. 대웅전 도편수를 배신하고 달아난 여인을 벌하기 위해 무거운 짐을 지우게 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법당 안 부처님이 아시면 경을 칠 이야기다. 그러나 오늘 내 눈에는 그 모습이 달리 보인다. 제 어깨로 큰 지붕을 이고 수백 년을 버텨 온 저 상들은 아마도 이 절과 품 안의 사고를 묵묵히 떠받쳐 온 이름 없는 수호자처럼 보인다.

  실록을 지켜 낸 자들은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무게를 견딘 이런 존재들이 아니었을까. 백성이 절을 지키고 절이 사고를 지켰다. 그리고 사고는 나라의 기억을 지켰다.

 사고의 기록은 지금 서울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으로 옮겨져 있지만, 그것을 오래도록 품어 낸 이 섬과 성, 절은 여전히 이 자리에 남아 있다. 오로지 사람만이 바뀔 뿐이다.

  무언가를 오래 지키는 힘은 높은 담 하나가 아니었다. 유구한 세월 바다와 산과 사람이 겹겹으로 포개진 ‘켜’에서 나왔다.

 사고는 오늘도 그‘켜’의 지혜를 속삭이고 있다.

 ‘가끔 시간 내어 찾아오라고, 그리고 잠시라도 기억해 달라고’

 

기획취재단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출처 : 전북도민일보(http://www.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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